언젠가 때가 되면 찬찬히 살피리라 생각하며, 어떤 기억들을 봉인해두었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찬찬히 살피리라 생각하며, 어떤 기억들을 봉인해두었었다.
기억의 봉인을 열며, 세월의 강을 건너, 버려진 내 영혼을 마주한다

그 때가 지금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리 건강하다고도 할 수 없고, 평정심 을 찾아 과거의 어느 때이든 담담히 관조할 수 있는 달관에 다다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자꾸만 생각은 지난 20년을 관통하고도 더 먼 기억 너머의 흔적을 더 듬고 있다.? 지금 이 때를 살아가는 데 혼란을 느끼게 되면,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분명히 자각하기 위해 애쓰게 된다.

오늘의 나는 분명히 지나온 과거의 흔적들이 쌓이며 만들어진 것임에 틀림없을 텐데도... 나는 도무지 연속된 하나의 상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틈만나면 옛 일기와 노트를 들추며 기억 속의 한 때에 잠겨드는 까닭은 그 때문일 것이다.

하나의 존재로 읽혀지지 않는 내 모습의 기록들

1997년 어느날 나는 이렇게 썼다.

"나는 굴 속에 머리를 쳐박고 /
탯줄을 따라 어둠을 더듬는다. /
누구도 고통을 즐기진 않는다. ...
그러나 ’고통의 늪’을 지나지 않고는 누구도 진실에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세상을 향해 돋아난 돌기들이 사정없이 쓸려나가 부러지고, 부숴지고, 마모된 다. 감각이 없을 지경으로... 휴식이 필요한 것이냐고 되묻고 있다."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개인사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었다.

"역사의 연구가 끝없이 유동하는 현재에 일정한 좌표를 설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연극사의 기술도 이와 유사한 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제 연극사 는 단순한 사실의 수집과 정리의 차원을 넘어서, 우리의 현재를 조망하는 비전 을 생산하는데 기여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과거를 일정한 체계 안 에 담아낼 수 있는 관점이 필요하다. 연극에 있어서 그 관점이 되는 것이 바로 시학이다. 우리는 이제 독자적인 시학이 요청되는 시기에 와 있다." (1997.6.8)

뒤를 돌아보는 것은 습관이기도 하고, 생각의 구조이기도 하고, 분명치 않은 인 식을 또렷하게 다듬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나는 최근 10년간은 거의 기 억 속에 가두어두고 있었다.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하게 되면서 부딪히고, 만나 고, 경험했던 그 모든 것들을 ... 어쩌면 나는 나의 일부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었는지도 몰랐다.

늘 어딘가에 속하지 못하고 부유물처럼 흘러다녔고, 제대로 소통되고 있지 못 하다는 감정에 깊이 빠져들곤 했다. 글을 쓰고 싶어했고, 한 때는 시를 쓰고 싶 었고, 시를 쓰기도 했다. 무대의 환상과 뜨거운 열정에 사로잡혀 극장에 들어섰 고, 사람의 영혼을 흔드는 격정적 이야기와 폐부를 쏟아내게 하는 웃음에 들뜨 기도 했다.

깨진 유리를 한 아름 물고 있는 것같은, 말들

'비극적 비전'을 화두로 10년을 탐구하기도 했고, '희극적 자세'를 익히기 위해 스스로 가벼워지도록 애쓰기도 했다. '나무요일'이라는 카페의 사 장님은 내게 외로울 고(孤)가 끼어있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여전히 소통은 어렵고, 입에는 깨진 유리를 한 아름 물고 있는 것처럼, 한 마디 한 마디가 아픔을 주곤한다.

지금의 이 때도 언젠가 돌아보게 될 것이다. 지난 기억의 봉인은 두려움과 비겁함 때문에 만들어두게 되었지만, 이제는 그런 식의 달아나기는 하지 않으려 한다. 어떤 아픔이든 그 괴로움과 맞서서 이겨내지 않으면, 언젠가 그 기억이 느닷 없이 덮쳐와 허물어질수도 있다는 걸... 이제는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알맞은 때가 되었는지 확신이 서지 않으면서도 옛 기억의 봉인을 열어보는 까닭도, 지금의 힘겨움을 충실하게 견디며 이겨내리라는 의지의 한 방편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강인하고, 열정적이며, 너그럽고 부드러운 마음의 뿌리

나는 홀로 바르게 서서, 강인하고, 열정적이며, 너그럽고 부드러운 마음의 뿌리를 굳게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긴 시간을 건 약속은 강한 의지와 식지 않는 열망을 품고 있지 않으면 지켜낼 수 없다.

묵혀두었던 지난 상처와 아픈 기억은 그 긴 시간 사이에 모두 다독여 풀어내려 한다. 더 이상 나의 영혼을 참담하게 짓밟지 않도록, 예민한 감성의 돌기를 단단한 통찰력으로 감싸안을 수 있도록, 지난 고통으로 인해 그 누구에게도 아 픔을 전해주지 않을 수 있도록...

침묵 너머의 마음을 읽어주는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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